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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심과 배짱으로 일궈낸 포니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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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8-07 18:5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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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심과 배짱으로 일궈낸 포니 신화

다음자동차 입력 2019.08.06 14:14 수정 2019.08.06 14:25
대한민국 대표 자동차 회사의 시작과 성공, 그리고 실패에 관한 모든 것(2)

독자모델 개발로 방향수정  

홀로서기. 자의반 타의반으로, 현대자동차가 택한 길이었다. 포드와 결별 직후인 1972년 3월, 당시 현대자동차 사장 정세영은 맏형 정주영과 함께 미국을 찾아 GM 담당자를 만났다. 그런데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귀국 직후 GM 쪽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난 관계자는 정세영에게 귀띔했다. GM이 신진자동차와 합작할 거라고. 예의를 갖췄을 뿐 일종의 통보였다.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가 현대차의 국내 최대 라이벌과 손을 잡겠다니,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1976년 울산공장

심지어 진행마저 속전속결이었다. 1972년 6월 7일, GM은 신진과 50대 50으로 합작해 GM코리아(GMK)를 설립했다. 현대차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답은 빤히 보이는데 엄두가 나질 않았다. 독자모델 개발이었다. 정세영에게 이 계획을 들은 정주영이 화답했다. “좋은 생각이야!”그런데 뜻밖에도 걸림돌은 내부에 있었다. 중역과 간부를 포함한 회사 전체가 반대하고 나섰다. 이유는 실력부족. “코티나 조립만 해봤을 뿐 도면조차 카피도 못하는데 어떻게 신차를 설계합니까?”기술 책임자의 뼈 때리는 직언이었다. 신차 개발에 투입해야할 시간과 자금 또한 문제였다. 하지만 정 사장이 밀어붙이자 간부들도 동요했다. 정부도 리나라 고유의 차종을 원했다. 때마침 김종필 국무총리는 “1973년 8월 5일까지 고유모델 승용차 공장 건설계획안을 제출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현대차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기획실을 부활시켜 가늠해본 신차개발 예산은 280억 원(7,000만 달러). 당시 현대차의 자본금은 17억 원이었다.  

1975년 울산공장

신차 디자인을 찾아 이탈리아로

고유 디자인은 신생 자동차 회사가 넘어서야 할 핵심 과제였다. 그러나 현대차에겐 아직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신차 디자인 의뢰할 곳을 백방으로 찾아 헤맸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에서 피아트 섀시로 여러 회사가 다른 차체를 설계해 팔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다. 정세영 사장은 당장 직원들과 함께 짐을 꾸려 이탈리아 토리노로 날아갔다. 피닌파리나(Pininfarina), 베르토네(Bertone), 기아(Ghia), 이탈디자인(Ital Design), 롬바르디(Lomvardi), 미케로티(Michelotti). 이탈리아엔 자동차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무려 6개나 있었다. 정세영 사장은 포드가 소유한 기아를 제외한 5개 회사를 모두 돌아보기로 했다. 피닌파리나는 피아트가 단골이고, 롬바르디는 규모가 대장간 수준이었다. 베르토네는 디자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케로티는 당시 GM의 호주 자회사 홀덴이 의뢰해 디자인한 차를 보여줬다. 듬직하고 괜찮았다. 그런데 70만 달러를 불렀다. 예상보다 훨씬 비싸 정세영이 깜짝 놀랐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탈디자인을 방문했다. 30대 중반의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디자이너가 그를 맞이했다. 조르제토 주지아로였다. 주지아로는 ‘잘 나가는’디자이너였다. 폭스바겐 골프와 시로코, 파사트를 비롯해 알파로메오와 이스즈 차종이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그는 120만 달러를 불렀다. 미케로티보다 50만 달러 더 비쌌다. 하지만 정세영은 주지아로의 젊음과 열정에 베팅했다. 계약서엔 ‘현대차 직원 10여 명이 그들의 스튜디오에서 디자인을 배울 수 있도록 한다’는 조건을 넣었다.  

포니 디자인 스케치

인재와 기술 확보로 바쁜 나날들

이제 고유모델 생산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차엔 자동차를 아는 인물이 드물었다. 심지어 공대 나온 직원이 30여 명에 불과했다. 답답해하던 정세영은 영국 출장 중 읽던 신문에서 눈이 번쩍 뜨일 기사를 발견한다. 당시 자동차 업계를 쥐고 흔들던 ‘브리티시 레이랜드 모터스의 조지 턴불 부사장이 사표 던지고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정세영은 이수천 이사를 코벤트리에 자리한 턴불의 집으로 보냈다. 이수천은 조선과 자동차, 건설을 하고 있는 현대를 열심히 설명했다. 허나 반응이 없었다. 두 번째 방문 때 그가 “한 번 가서 보고 싶다”며 호기심을 보였다. 정세영은 자신도 못 타본 일등석 티켓을 보내 그를 초청했다. 그리고 조선소 건설현장과 1만5,000평에 불과한 자동차 공장을 보여줬다. 정 사장은 “현대차는 손대지 않은 원석과 같다”고 강조하며 부사장직을 제안했다. 턴불이 의욕을 보였다. “아내와 의논해서 승낙하면 오겠소.”얼마 후 턴불은 5명의 정예 엔지니어를 데리고 울산으로 왔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영국 BMC 엔지니어들은 “큰 인재를 잃었다”며 안타까워했다. 한편, 턴불의 아내는 한국이 나라 이름인 줄도 몰랐다는 후문이다. 다음 숙제는 파워트레인 확보. 현대차는 전 세계 자동차 회사에 기술제공 가능성을 타진했다. 반응은 썰렁했다. 정세영 사장은 한 번 더 미쓰비시를 찾았다. 간곡한 설득 끝에 엔진과 변속기 기술제휴를 맺는데 성공했다. 미쓰비시의 구보 사장은 “현대차가 좋은 엔진을 만들 수 있도록 잘 가르치라”고 지시했다. 그는 자신을 백제의 후예라고 믿는 친한파였다.  

기술을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현대차는 미쓰비시로 기술연수팀을 보냈다. 첫 팀엔 일본어 가능한 직원이 한 명뿐이었다. 따라서 수업을 마친 뒤 호텔방에서 다시 한국어로 설명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3개월 뒤 파견한 두 번째 팀은 그 사이 일본어를 공부해 미쓰비시를 놀라게 했다. 연수를 담당하던 강명한 이사는 직원들에게 ‘절삭공법’이란 180페이지짜리 일본 원서를 통째로 외우게 했다.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밤샘을 마다하지 않던 그 즈음, 주지아로가 미쓰비시 파워트레인을 얹은 시제차 1호를 보내왔다. 1974년 6월이었다. 정세영은 즉시 차 이름을 공모하도록 지시했다. 7월 18일~8월 25일, 39일 동안 1호차를 부상으로 걸고 시작한 공모엔 6만 여장의 엽서가 모여 들었다. 아리랑, 도라지, 무궁화 등 한글 이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포니 3도어

결정은 쉽지 않았다. 정세영은 엽서를 정리하던 10여 명의 아르바이트 여대생에게 투표하도록 했다. 젊은 세대의 감각이 더 어필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여대생들은 조랑말을 뜻하는 포니를 골랐다. 100여 건 정도 응모된 포니 엽서를 통에 넣고, 경찰관 입회하에 추첨했다. 충주에서 양복점하는 사람이 뽑혔다. 공교롭게도 가게 이름이 현대양복점이었다. 이제 자금을 확보할 차례. 정세영은 코티나 공장 지을 때 자금을 제공한 영국 버클레이 은행을 찾아 1,700만 파운드를 빌렸다. 프랑스 수에즈 은행에선 프랑스산 프레스 기계를 사기 위한 1,400만 달러를 빌렸다. 1974년 4월 16일, 현대차는 기업을 공개하고 신주를 공모해 납입자본금을 40억 원으로 늘렸다. 실탄을 마련했으니 생산라인을 만들어야 했다.  

판매 시작과 동시에 뜨거운 인기

 1975년 6월까지 연간 5만6,000기의 엔진 공장, 11월까지 전체 공장 완공. 정세영의 타임라인을 접한 턴불 부사장이 한국어로 말했다. “택도 없심다!”금형을 맞추고 수정하는 데만 최소 2년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허나 정세영은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이탈디자인으로 직원을 보내 생산 과정을 샅샅이 살피게 하고, 일본 부품회사에 금형을 맡겼다. 1974년 1월, 이탈디자인에서 1호차 품평회를 치렀다. 정세영은 같은 해 10월 30일부터 토리노에서 치를 국제모터쇼에 포니를 내보내기로 결심한다.

1974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 전시된 포니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포니와 포니 쿠페는 업계와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이듬해 1월, 현대차는 이탈디자인으로부터 프로토타입과 설계도면을 모두 인수받았다. 동시에 1년간의 테스트가 막을 올렸다.  턴불 부사장의 걱정은 기우였다. 1976년 1월, 현대차는 모든 테스트를 마치고 포니 생산에 나서 2월 29일부터 출고하기 시작했다. 포니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길이와 너비, 높이 3,970×1,558×1,360㎜의 차체에 직렬 4기통 1,238㏄ 새턴 엔진을 얹고 80마력을 냈다.  포니는 고속주행과 등판능력이 좋고 기동성이 뛰어나 특히 택시로 인기를 끌었다.

포니2 5도어

당시 포니 가격은 영업용이 204만7,300원, 자가용이 227만3,270원이었다. 현대차는 데뷔 첫해 포니를 1만726대 팔았다. 6,916대의 기아 브리사를 제치고 국내 승용차 시장 1위를 꿰찼다. 1976년부터 세계 경기가 호황을 맞으면서 국내 경제도 활기를 띠었다. 따라서 현대차는 4도어 해치백 이외에 3도어, 왜건, 픽업 등 포니의 가지치기 모델을 늘렸다.(3부에서 계속)

포니 왜건
포니 쿠페

글/김기범(로드테스트 편집장) 사진/현대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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